[목요논단]겨울의 문턱에서 '삶'을 보다
입력날짜 : 2009. 11.12. 00:00:00
제주섬 가을 초입에 저 '미여지벵뒤' 끝자락 어딘가에서부터 수줍게 피어나기 시작하여 한 겨울 설한풍이 모질게 대지를 휩쓸 그 때까지도 빛바랜 지 오래됐어도 저절로 사위는 몸을 옹송그리며 선연히 몸짓 놓지 않는 제주억새에서 배울 삶은 무엇인가, 삭막하나 풍요로워 아름답다 못해 가슴이 절로 시려오는 이 계절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인다.
그 무엇인들 묵은 것이면 이 맘 때쯤엔 다 세상에 부려놓고 떠나야 한다는 명제를 완성할 듯이나 낙엽 한 닢 나무에 붙여두지 않고 미련 한 점 없는 이처럼 뒤 한 번 돌아보는 새 없이 저만치 내달리는 만추의 뒷덜미에 대고 다시 못 볼 어여쁜 이에게나 죽을 용기를 내어 마지막으로 해보는 묵언의 몸부림을 제주억새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토록 적나라하게 오늘도 열심이다.
제주억새는 언제부턴가 꽃이 늙어 하얗게 바랜 이후라야 사람들 눈길을 사로잡는 들풀이다. 한동안은 원시림이 사라진 자리에 뒤이어 나타나는 식생이라하여 수림지대의 환경영향을 평가하는 지표식물로도 식자들에게 회자되었다. 사람이 어떻게 가늠하든 개의치 않고 늘 시간에 맞추어 해마다 이 맘때 제주벌판에 등장하는 자연의 춤꾼인 억새무리이다. 바람결 따라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면서 대지의 오뇌를 한껏 품은 채, 어디 땅 끝에 닿는 순간을 기다려 지체하지 않고 하얀 포말로 산산이 부숴 흩뿌리는 겨울바다처럼 제주억새는 바람살이 모질다 하지 않고 신명내어 출렁인다. 그 품새가 벌판에 다가드는 사람의 눈에는 그리도 헌거롭게 보인다.
하지만 제주억새는 꽃이 늙어 사람 눈요기하기 훨씬 이전, 어린 순이 돋아날 때부터 그 쓰임새가 일품으로 제주사람을 도운 익초(益草)였다. 여름이 무르익을 즈음 꽃을 품은 순을 뽁뽁 뽑아 아름드리로 다발을 묶고는 등짐으로 몇 번 져 나르면 어른아이 할 것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마당 가득 퍼질러 앉아 꽃을 싼 껍질을 벗겨낸다. 꽃은 솜사탕처럼 달콤하여 아이들 주전부리로 제격이었다. 그렇게 실컷 먹다가 남은 꽃과 깐 껍질은 처마위에 널어 잘 말린다. 어린 꽃은 마르면 지금 저 들판에서 물결치는 그 모양으로 피어난다. 그러면 한줌씩 잡아 칡 줄기로 단단히 엮어가며 기다랗게 '화심'을 만들어 두었다가 불씨를 저장하곤 하였다. 비바람에도 끄떡 않고 불씨가 살아있어 난바다에 고기잡이 가는 '보제기', 곶자왈에 마소 돌보러 가는 '테우리'며 집 안팎살림에 누구나 지참하는 전천후 불씨막대였다. 그리고 껍질을 말려서 '덩드렁마께'로 자근자근 두드려 부드럽게 편 다음 잘게 쪼개어 꼰 노끈은 제주해녀의 '망사리'를 짜거나 그물코를 줍는 '베릿배' 등 주로 물이 닿는 도구에 썼다. 억새꽃껍질로 꼰 '미날(ㄴ+아래아 · +ㄹ)'은 천년이 흘러도 썩지 않는다는 전설을 낳으며 나일론 끈이 보급된 후에도 한참이나 더 애용됐었다. 그 뿐인가. 묵은 억새는 초가의 가라앉은 지붕을 수리하는 데서부터 창문에 덧대어 비바람을 가리는 '뜸으로, 땔감으로 그 쓰임새도 다양했다. 그러나 이제, 제주억새는 벌판의 일회용 눈요깃감에 불과하다.
그러고 보면 제주억새는 예만 못해도 한번은 눈요깃감이라도 된다. 그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단 한 번도 자신을 펼쳐보지 못하고 세상을 서성이는 '사람'이 요즘은 지천이다. 몇 년 전 '쓰레기가 되는 삶들(Wasted Lives: Modernity and its Outcasts)'이란 책을 통하여 소비시대인 지금, 잉여인간은 가차 없이 폐기처분된다는 이론을 제시하여 우리의 간담을 서늘케 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예언은 실현되고야 만 것일까? 그래도 시대를 휩쓰는 절망을 딛고 서걱이는 제주억새의 마른 잎에서도 희망을 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은 하나, 사람은 사람임을 사람이 아는 세상이 오는 바로 그 현실을 지향하는 것이다.
<한림화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