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여성이 말하게 하라/한림화.작가
'새로운 천년(New Milenium)'이 이제 코앞에 다가왔
다. 유한한 생명체인 인류사회 앞에 다가서는 그 시간단
위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인간으로하여금 경외심을 가지
게 하고도 남는다.
어찌보면 무한히 흐르는 시간속에서 인간은 한 시점에
나타났다 소멸하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을 엮어 역사를 쓸 줄 아는 인간에게 있어 시
간은 순간의 족적을 남기는 매개체인 귀한 수레바퀴와도
같다. 시간이 없으면 인류역사는 미래를 향해 전진하지
못한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매 순간 자신의 존재에 대
해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은 그래서 당연한 것인지도 모
른다. 때문에 어느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 물리적으로 가
해지는 인간의 권리침해 혹은 박탈 등의 폭력은 존재의
이유를 타자에 의해서 타자가 원하는 바 잣대에 의해 확
인되는 수단임으로 당연히 저항에 부딪친다.
50년 전 제주섬에서 있었던 4·3 항쟁도 이러한 맥락에
서 인류역사의 한 장을 비극으로 쓴 사례이다.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희생제물로 바쳐진 수만명의 제주사람 목
숨은 국가에 의해 존재확인이 줄곧 거부되어 왔던 터이
다.
지난 8월 21일부터 24일까지 제주도 제주시에서, ‘제
주4·3 제5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21세기 동아
시아 평화와 인권’이란 주제로 한국·대만·일본·오끼
나와에서 무려 삼백 여명이 몰려들어 지대한 관심속에
열렸다.
지난해 2월, 대만에서 ‘2·28백색테러’에 대해 대만
정부의 사죄가 선행되면서 열렸던 ‘동아시아 냉전과 국
가테러리즘’에 이은 제2회 심포지엄이어서 참가자들은
제주4·3 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는 물론 주제를 잘 인
식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한국의 역사속에서 “…정당한 명칭을 부여하
지 못함으로써 아직까지 역사가 못되고 ‘사건’으로
떠돌아 다니는”(이 대회의 한국대표인 강만길 교수가
대회사에서) 4·3, 드디어 기다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이제 밝은 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은 이
심포지엄를 통해 얻은 값진 결과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심포지엄에서 ‘폭력으로 얼룩진 20세
기 동아시아 역사에서 이중의 희생자였던 여성’(한겨레
신문,8 8월 23일자)들이 스스로 ‘냉전체제 폭력과 동아
시아 여성’이란 주제를 내걸고 심도있게 국가권력과 여
성인권과의 상관관계를 사례를 들어가며 면밀히 살펴봤
다는 데에 대단한 의의가 있었다고 본다.
인류사회에서 벌어지는 어떠한 문제를 다룰 때 여성은
별개로 취급을 받는다. 남성 문제는 사회의 문제이지만
여성문제는 그저 여성문제일 뿐이다.
이렇게 이분화된 현상의 근본원인은 어디에서 기인하
는 것일까. 남성의 인권은 인류사회와 민족과 국가라는
차원에서 사회성을 띠고 명분있게 다뤄지는 반면, 여성
의 인권은 개인차원에서 ‘특별히 다뤄야 할 대상’으로
치부해왔던 게 사실이다. 이 심포지엄에서는 바로 그러
한 인류사회의 양분화된 인권의 허구성을 여성에 의해
낱낱이 지적해 나갔다. 국가 폭력에 의해 여성사회가
내부에서부터 이분화되고 있음도 종합토론을 통해 가시
화된 것은 여성사회를 새로이 점검해볼 여지를 남겼다
고 본다. 또한 국가간의 협정 문건에는 반드시 ‘여
성과 어린이’에 대한 조항을 넣게 하자고 결의했다. 이
뿐이 아니라 소수민족이 당면한 멸족 위기, 소외감, 정
체성 등도 심도있게 거론되었다. 그리고 중국과 북한의
여성도 함께 자리를 할 수 있는 길을 다음 심포지엄에서
는 모색해보자는 의견도 있었다.
“여성에게도 국가가 있는가”라는 자조 섞인 질문은 심
포지엄 내내 여성참가자 사이에 오갔고, 결론은 “이제
는 여성이 말하게 하라!”로 내려졌는데, 사실 이 명제
는 ‘여성과 인권’이 슬로건으로 내건 이 심포지엄의
화두선이기도 했다.
다가오는 ‘새로운 천년’에는 인류사회에서 어느 성
(性)이 다른 어느 성을 예속하거나 예속당함이 없이 더
불어 살며 공생공영할 수 있기를, 지금까지 억압당해온
여성에게 있어 인권이 회복되는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여성참가자들은 나름대로 제몫을 충실히 다한 시간이었
다. 그 결과는 역사속에서 증명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