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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한라일보 [강문규칼럼]잃어버린 제주의 얼굴·정신 되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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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라산한란 2011. 4. 1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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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규칼럼]잃어버린 제주의 얼굴·정신 되찾기


입력날짜 : 2011. 04.19. 00:00:00

얼마전 서울에 거주하는 지인으로부터 제주의 아름다운 전통 기와집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언젠가 고향에 내려와 살고 싶은데 제주형 기와집이 있으면 그렇게 짓고 싶다고 했다. 우선 '제주의 문화재'라는 책을 소개해 드리긴 했는데 전통건축의 문외한으로서 더 이상 안내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를 정리한 논문이나 책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초가와는 달리 자료가 극히 빈약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간혹 제주시 원도심권에서 살아온 고로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지금의 중앙로 동·서쪽에는 많은 기와집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한짓골과 이앗골, 향굣골(校洞)을 중심으로 당시 지배층이 집단 거주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옛 사진을 보면 관덕정 전면에서 좌·우로 커다란 기와집이 들어선 거리풍경도 나타난다. 이것 역시 조선시대 그곳에 좌·우위랑이 있었던 기록과 일치하는 건물들이다.

지명유래도 흥미롭다. 지금의 한짓골에서 중앙성당을 끼고 서쪽으로 돌아가는 골목을 '불망골'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불 막는 골'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성안 대부분의 초가집들이 밀집해 있어 화재가 나면 성안 전체가 화마에 휩싸이는 일들이 있었다. 그래서 관아 밀집 지역에는 길을 넓게 만들어 방화선을 구축한 것이다. 도문화재위원인 김익수선생께서 들려주셨는데 찾아보면 이런 이야기가 깃든 골목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처럼 1000여년을 훨씬 넘게 제주의 모습을 간직했던 원도심은 일제강점기 이후 심히 일그러진 형태로 바뀌게 된다. 조선시대의 건축물과 유적이 급속하게 사라지는데 첫번째 작업이 제주목관아 훼철이었다. 목사의 집무처인 연희각을 비롯한 수백년 된 건물들을 헐어낸 자리에는 일본 기와집인 제주도청(濟州島廳)이 들어섰다. 판관이 집무했던 이아(二衙)와 좌·우위랑, 도민들의 정신적 구심점인 칠성대와 사직단도 파괴해 버렸다. 일제의 침탈과 지배는 제주 역사·문화 등을 해체하는 작업부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포석(布石) 의도는 거의 적중(?)했다. 지금도 제주도시가 제주적인 정체성을 찾지 못해 헤매고, 도민들도 선인들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배경도 따지고 보면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례를 칠성대유적은 잘 보여주고 있다. 기원후 5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칠성대는 탐라인들의 결속과 단합, 탐라의 융성을 기원하기 위해 성안 일곱군데에 북두칠성 모양으로 쌓은 유적이다. 그런데 1천년을 훨씬 넘어 1926년까지 남아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사라져버렸다. 지금 그것을 복원하려고 해도 자취를 찾기도 쉽지 않으니 제주문화에 대못박기 또는 제주역사 지우기의 표본이다.

그러나 모든 잘못을 일제의 잘못으로 떠넘기는 일은, 작은 위안은 될지언정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올바른 지혜는 아니다. 해방된 지도 65년이 되고 있다. 이제는 내부의 뼈저린 성찰도 있어야 한다. 제주인들이 가장 부끄러워 하는 말 중에 "정체 어신 놈"이라는 말이 있다. 한마디로 정신 빠진채 허둥대는 사람을 나무랄 때 쓴다.

정체성(正體性) 찾기는 사람에게나 도시에게나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제주역사·문화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제주시 원도심에 관한 전면적인 조사부터 시작하는게 순서일 것이다. 원도심은 탐라시대부터 고려·조선·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현대에 이르는 자취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압축 파일'과 같은 지역이다. 이러한 종합적·통시적 조사연구가 이뤄지게 된다면 제주는 머지 않아 '잃어버린 얼굴과 정신'을 되찾게 될 것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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