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에 이어 어제도 눈 위를 걸었다.
오랫동안 같이 못했던 오름 모임에 나갔더니, 눈밭으로 가자고 한다.
밤새 내렸던 비가 600m 고지 위에서는 눈으로 변해 있었다.
제1횡단도로(5.16도로)로 서귀포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만원이어서 더러 통로에 서 있는데, 등산복 차림도 많다.
성판악 휴게소에서 내려 남쪽으로 향했다.
마침 해가 구름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고 눈길을 밝게 하다가
눈발이 날리자 다시 들어가 버린다. 숲 터널에 이르렀을 때는
벚꽃 핀 나무 그늘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푹푹 빠지는 길을
걸어 어렵게 오름 분화구에 다다랐을 때 다시 한 번 해가 빛났다.
♧ 설경(雪景) - 이향아
호사스런 것은 사양했는데
비어 있는 뜨락에
메밀꽃 같은 눈이 내리네
축제의 날 정한 묵념의 행렬에 끼어
흐르는 깃발같이 음율 같이
소리하지 못한 우리들의 언어가
저리 풍성한 은혜로 오는가
한 번쯤 분출을 기도하던 하늘이
상벌을 베푸는 것인가
황홀히 울먹이는 휘장 속
사람보다 포근한 온기여
사철 고슴도치 같은 일과표 속
꽃
각
시
나는 연지를 바르고 섰다
♧ 설경 - 주경림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는 하늘
소복 입은 여인의 모습으로 눈부신 산봉우리
치맛자락 펄럭일 때마다 비늘로 흩어지는
뿌리 내리지 못한 영혼의 춤
꽃 순보다 뜨거운 열정 못 이겨
뚝뚝 마디를 끓어내고 하얀 무덤 되는 겨울나무
갈비뼈 드러냈던 마른 들판
조용한 겨울잠에 묻혀버리네
날아갈 때를 놓친 철새 한 마리
깃털 뽑히는 아픔으로 목청을 돋구어
막막한 그리움으로 하얀 무덤을 조금씩 흔들어보네
발목 끊어내고 멀리 갈 줄 알았던 연 꼬리
곤두박질 쳐서 비석으로 꽂혀있다
눈물 글썽이던 하늘 저 편에는
칼날처럼 차갑게 웃는 햇살 받아
지상은 살아있는 것들의 무덤으로 빛난다
하늘의 품으로
♧ 설경(雪景) - 명위식
온 산야 펼쳐 놓은 은세계
눈이 시리도록…
먼 산허리를 아련히 감싸고 있는
뽀오얀 안개구름 위로
두둥실 떠 있는 백설의 산
나무들은 어깨마다
지구의 무게를 느낀다
조금씩 부서져 내리는
생활의 살점들
세상은 평화 속에 잠이 들고
모든 걸 덮어 버렸다
미움도 불신도
추하고 더러운 것도
무수한 세상의 욕망들이
숨을 죽이고 있다
하얗게 펼쳐 놓은
화선지 위로
작은 새 한 마리
포르르 선을 긋는다.
♧ 눈 오는 날의 편지 - 유안진
목청껏
소리치고 싶었다
한 영혼에 사무쳐
오래오래 메아리치도록
진달래 꽃빛깔로
송두리째 물들이며
사로잡고 싶었던
한 마음이여
보았느냐
보이는 저 목소리를
기막힌 고백의
내 언어를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우며 울림하며
차가운 눈발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뜨거운 외침을 보았느냐.
♧ 눈발 - 정호승
별들은 죽고 눈발은 흩날린다
날은 흐리고 우리들 인생은 음산하다
북풍은 어둠 속에서만 불어오고
새벽이 오기 전에 낙엽은 떨어진다
언제나 죽음 앞에서도 사랑하기 위하여
검은 낮 하얀 밤마다 먼 길을 가는 자여
다시 날은 흐르고
낙엽은 떨어지고
사람마다 가슴은 무덤이 되어
희망에는 혁명이
절망에는 눈물이 필요한 것인가
오늘도 이 땅에 엎드려 거리낌이 없기를
다시 날은 흐리고 약속도 없이
별들은 죽고 눈발은 흩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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