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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눈밭을 마냥 걸었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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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라산한란 2009. 12. 2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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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에 이어 어제도 눈 위를 걸었다.

오랫동안 같이 못했던 오름 모임에 나갔더니, 눈밭으로 가자고 한다. 

밤새 내렸던 비가 600m 고지 위에서는 눈으로 변해 있었다.


제1횡단도로(5.16도로)로 서귀포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만원이어서 더러 통로에 서 있는데, 등산복 차림도 많다.

성판악 휴게소에서 내려 남쪽으로 향했다.


마침 해가 구름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고 눈길을 밝게 하다가

눈발이 날리자 다시 들어가 버린다. 숲 터널에 이르렀을 때는 

벚꽃 핀 나무 그늘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푹푹 빠지는 길을

걸어 어렵게 오름 분화구에 다다랐을 때 다시 한 번 해가 빛났다.



 

♧ 설경(雪景) - 이향아

 

호사스런 것은 사양했는데

비어 있는 뜨락에

메밀꽃 같은 눈이 내리네


축제의 날 정한 묵념의 행렬에 끼어

흐르는 깃발같이 음율 같이


소리하지 못한 우리들의 언어가

저리 풍성한 은혜로 오는가

한 번쯤 분출을 기도하던 하늘이

상벌을 베푸는 것인가


황홀히 울먹이는 휘장 속

사람보다 포근한 온기여


사철 고슴도치 같은 일과표 속

나는 연지를 바르고 섰다



 

♧ 설경 - 주경림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는 하늘

소복 입은 여인의 모습으로 눈부신 산봉우리

치맛자락 펄럭일 때마다 비늘로 흩어지는

뿌리 내리지 못한 영혼의 춤


꽃 순보다 뜨거운 열정 못 이겨

뚝뚝 마디를 끓어내고 하얀 무덤 되는 겨울나무

갈비뼈 드러냈던 마른 들판

조용한 겨울잠에 묻혀버리네


날아갈 때를 놓친 철새 한 마리

깃털 뽑히는 아픔으로 목청을 돋구어

막막한 그리움으로 하얀 무덤을 조금씩 흔들어보네

발목 끊어내고 멀리 갈 줄 알았던 연 꼬리

곤두박질 쳐서 비석으로 꽂혀있다

눈물 글썽이던 하늘 저 편에는

칼날처럼 차갑게 웃는 햇살 받아

지상은 살아있는 것들의 무덤으로 빛난다


하늘의 품으로



 

♧ 설경(雪景) - 명위식

 

온 산야 펼쳐 놓은 은세계

눈이 시리도록…

먼 산허리를 아련히 감싸고 있는

뽀오얀 안개구름 위로

두둥실 떠 있는 백설의 산


나무들은 어깨마다

지구의 무게를 느낀다

조금씩 부서져 내리는

생활의 살점들


 

세상은 평화 속에 잠이 들고

모든 걸 덮어 버렸다

미움도 불신도

추하고 더러운 것도

무수한 세상의 욕망들이

숨을 죽이고 있다


하얗게 펼쳐 놓은

화선지 위로

작은 새 한 마리

포르르 선을 긋는다.



 

♧ 눈 오는 날의 편지 - 유안진


목청껏

소리치고 싶었다

한 영혼에 사무쳐

오래오래 메아리치도록

진달래 꽃빛깔로

송두리째 물들이며

사로잡고 싶었던

한 마음이여


보았느냐

보이는 저 목소리를

기막힌 고백의

내 언어를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우며 울림하며

차가운 눈발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뜨거운 외침을 보았느냐.



 

♧  눈발 - 정호승


별들은 죽고 눈발은 흩날린다

날은 흐리고 우리들 인생은 음산하다

북풍은 어둠 속에서만 불어오고

새벽이 오기 전에 낙엽은 떨어진다

언제나 죽음 앞에서도 사랑하기 위하여

검은 낮 하얀 밤마다 먼 길을 가는 자여

다시 날은 흐르고

낙엽은 떨어지고

사람마다 가슴은 무덤이 되어

희망에는 혁명이

절망에는 눈물이 필요한 것인가

오늘도 이 땅에 엎드려 거리낌이 없기를

다시 날은 흐리고 약속도 없이

별들은 죽고 눈발은 흩날린다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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