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산책, 한라생태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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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붉게 익은 산딸나무 열매가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한라구절초의 여린 꽃잎들은 이따금 숲을 휘감아 도는 바람에 몸을 맡겨 아무렇게나 흔들리고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 먼 바다 다도해의 섬 그늘 뒤로 내려앉는
저녁노을의 장엄한 빛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을 때, 내 등 뒤로 한가위 밝은
대보름달이 둥실 떠오르고 있음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라산과 산이 거느린 크고 작은 오름들의 능선이
농담(濃淡)이 잘 표현된 한 폭의 수묵화처럼 먹빛으로 어두워진 그때,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멈춘 듯 숲은 고요했다.
그리고 그 순간,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을 빌려 나는 잠시 자연에서 생의 전율을 느꼈다.
거기 있었다. 하늘과 햇살과 바람, 나무와 들꽃, 새들의 날갯짓과 지저귐 모두 그 숲에 있었다.
익숙한 풍경 속에 숨어있는 낯선 것들.
놓치거나 눈길 주지 않고 스쳐지나갔던 것들이 그 숲에 있었다.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것들, 제 차례가 돌아와 꽃피우려는 것들이 거기 있었다.
인공적으로 조성했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간섭은 가급적 최소화한 공간엔
이미 그렇게 자연의 질서가 자리잡고 있었다.
제주바다의 푸른 물결 너머 수평선에 떠있는 다도해 몇몇 섬이 손에 잡힐 듯한 풍경들이
덤으로 숨어있는 숲이 고맙게도 도심 가까이 내려왔다.
그러니 그 숲에 가시면 느리게, 아주 느리게 걸으시라.
목소리는 조곤조곤 낮추고 가끔 발길을 멈춰 숲의 소리를 들으시라.
지금 가을 숲에 들어있으나, 하얀 눈에 덮인 숲길에 찍힐 첫 발자국을 예감하는 즐거움은 내 것이며, 또한 그대의 것이니.
<이종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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