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인연 사이에 놓인 우연에 관한 보고서1

소설

by 한라산한란 2007. 12. 18. 18:23

본문

인연 사이에 놓인 우연에 관한 보고서

 

 

 

                       한 림 화

 

그것에 대한 나의 호기심  

    나는 고고학자도 아니고 사학자도 아니다. 따라서 그 경주고분들 발굴은 고사하고 무슨 선사유적 한 곳인들 발굴하는 현장에 참여한 적이 없다. 그럼으로 내가 그것, 6세기 초 쯤 축조되었을 거라고 추측하는 고신라 시대 사람

어느 누군가의 무덤에 부장된 화살집 장식 걸쇠에 대하여 낯선 이국에서 예전에는 전혀 모르던 어떤 사람과 우연히 몇 마디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 전혀 몰랐던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었다.

내 신분이라며 내 이름 뒤에 따라 붙는 것이 하도 막연하고 추상적이어서 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오만여 가지가 넘는 직업이 있다고는 하지만 나 자신조차도 그러한 직업이 있는 지 헛갈리기 일쑤이다.

그러니까 별다른 직업이 없는 시쳇말로 백수에 불과했던 내가 어쩌다 아주 가끔씩 환경관련학자들이 써내는 보고서 비슷한 원고를 읽어주고 수정해 주는 일 아닌 일을 오래도록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남들이 나에게 ‘환경학자 글 봐주는 전문가’ 라고들 불렀다. 무슨 놈의 환경학자 글 봐주는 전문가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 문제는 나에게 따질 일이 아니다. 나는 엄연히 학자 누구의 조교거나 연구보조원은 물론 아니고 옛날에 사무실에서 심부름하던 아이한테 붙여 부르던 급사를 좀 미화시킨 단순한 보조원도 아닌데다가 내가 그들과 직접 연결될만한 학교나 연구소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다. 꼭 그런 명칭이 직업목록에 있고없고 간에 그들이 일을 맡기는 자에 대한 나, 즉 나의 레벨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우스개 소리로 저들끼리 부르다보니 그게 어느새 굳어져 버렸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마 후자일 것만 같다. 

처음에는 그냥 아는 사람의 부탁으로 마지못하여 원고를 읽고 수정해 주었다. 그 사람은 내가 일 없이 노는 게 안타까워서 그 일을 주었다고 후에 생색을 내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 일이 영 내키지 않으면서도 어쨌든 맡은 일이다 싶어 며칠 밤을 지새울 정도로 힘에 부치면서도 꼼꼼하게 마무리를 지어 주었다.

내가 읽고 수정해야 하는 글들은 천편일률적으로 문법이 엉터리인 문장 구사는 그렇다고 쳐도, 너무 엉망진창으로 쓴 것들이 다반사여서 단순하게 읽고 오자나 탈자 정도 수정하여 될 일이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러한 전문적인 글들을 수정하기에는 실력이 딸렸던 것도 힘겨웁게 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내 자신이 환경에 관해서는 옛날 한 옛날에 미국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서로 낯을 익히기 시작한 친구의 손에 이끌려 그린피스란 환경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한 것, 그 때 덤으로 얻어들은 잡다하면서도 얇은 지식이 전부였다.

첫 일을 해주고 얼마 후부터 이 사람 저 사람이 처음 그 일을 부탁했던 사람의 소개라면서 집으로 찾아와 일거리들을 놓고 갔다. 인터넷이 보급된 십오 년 전쯤부터는 대놓고 이메일에 파일을 첨부하여 텀벙텀벙 일감들을 떨어뜨려 놓았다. 그렇게 시작된 그 일이 무려 스무 해 가량 계속되었다. 그 쪽에서 정해놓은 보수도 없었고 내 쪽에서도 돈을 받자고 시작한 일이 아니니 그 문제에 관하여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누구 말마따나 라면을 먹을망정 굶어 죽지 않는 다음에야 혼자 입에 거미줄 치는 것도 아닌데 아득바득 그 보수 가지고 뭐라고 해봤자 사실 말이지 나만 치사한 년 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잠 못 자고 눈 아프고 두 어깨에 오십견이 결려 팔을 제대로 들어올리지 못할 때도 있으면서 한 일을 글쎄, 주는 것 마다하면서 전혀 받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가끔씩 생각해서 집어주면 푼돈도 얻어 쓰고 또 어떤 때는 빵 봉지로 그 일 값을 얻어 받곤 하였다.

내 이력이 그랬으니 그 화살집 청동 걸쇠며 그것에 쓰인 재료가 무엇인지  내가 알 하등의 이유가 없었으며 따라서 알바도 아니었다.

정말로 우연히 나는 그 화살집 장식걸쇠에 얽힌 수수께끼 같은 몇 사람의 운명 속으로 나도 모르게 제 발로 걸어들어 가 버린 것이다. 우연에 우연이 몇 거듭되면서 억제할 수 없는 호기심이 나를 머리끝에서 발끝 까지, 무의식에서 의식의 끝까지를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것과 얽히고설킨 옛사람들의 일천육백 여년 역사 속에 묻힌 삶을 어떻게 해서든지 알아내지 않고서는 도무지 몸살이 나 몸져누운 몸뚱이를 추스를 수 없었고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으며 그 이외의 일을 할 수도 없었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느냐고 다그치면 또 대답이 궁색해질 수 밖에 없다. 나를 그렇게 몰아세운 결정적인 동기조차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별다르지 않은 우연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작년 이맘 때, 여름이 한창 무르익어갈 유월 초쯤 일본에서 만난 길동무한테서 그것의 정체에 관하여 처음으로 얼핏 듣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태어난 제주도 성산포 출신인 나의 어머니는 외동딸이었는데 넉넉하게 사는 형편도 아니면서 부모의 특별한 배려로 소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우리가 일본에 먹힌 가장 큰 원인은 인재가 없고 백성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때문이라며 딸을 소학교에 보내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한다. 그 때 같이 공부했던 일본인 친구가 한일수교 이후에 어머니한테 소식을 보내온 이후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누던 참이었다. 십여 년 전 늘그막에는 그 친구의 초청으로 일본을 여행하던 중에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가능하면 어머니 기일에 맞추어 오사카 남쪽 이세반도 끝자락에 자리 잡은 구마노(熊野)라는 작은 시골 도시를 찾아가곤 하였는데 거기서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이 세상과 하직하였기 때문이다. 바닷가에 잇대어 첩첩이 겹쳐진 깊은 산과 계곡의 절묘한 아름다움이 마음을 사로잡는 곳이기도 하다. 그 도시에는 구마노고도(熊野古道)라는 오랜 명승지가 있는데 에도시대의 순례길이라고 하였다. 어머니를 추억하러 일년에 단 한 번 들러서는 깊은 회한에 빠지곤 하는 그 나들이. 이 세상의 육신을 부려놓고 저 세상으로 길 떠나는 여정이 왜 하필이면 이 낯선 이국땅이었어야 했는지를 수도 없이  반문했다.

오사카에서 기차로 두 시간 여를 꼬박 달려가야 하는 어머니 제사를 지내러 가는 길. 태평양의 남동쪽 길목에 자리 잡은 외진 그 곳까지 가는 여정에 그는 공교롭게도 내 맞은 편 자리에 앉았던 것이다.

일본 사람들 인사성 바른 거야 이미 알려지다가도 남은 일 아닌가. 비좁은 특급열차에 마주 앉았으니 남자인 그가 여자인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였다고나 할까, 그가 보내오는 일본말 인사를 받아서 나도 모르게, 네. 안녕하십니까? 하고 한국말로 대답했다. 그는 이어,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왔다. 나는 어머니 기일에 맞추어 구마노시를 방문한다고 대답하였다.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인사가 다 그런 절차를 거치듯 그 역시 내 대답에 부쳐 한국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뭐 적당히 대답해도 되는 것을 굳이 제주도에서 왔노라고 반듯하게 맞받았다.

형식적으로 인사말을 건네던 그의 얼굴에 순간 밝은 미소가 번졌다. 제주도에 여행을 간 적이 있다고 하였다.

“내 개인적인 역사도 있습니다.”

자신을 가리키며 혼잣말처럼 한 마디 더하고 나서 그는 여행을 떠난 이유를 설명하였다. 무슨 특별히 찾아야할 벌레가 있는데 그즈음이 막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여서 길을 떠났노라면서 자기도 구마노시 근방에 간다고 하였다. 

그는 내가 그저 형식적으로 예, 예, 하고 그의 말끝에 덧붙여 대꾸를 할 뿐인데도 혼잣말처럼 여행을 떠나온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이어갔다.

구마노시 근방의 산 속에는 느릅나무며 팽나무며 벚나무며 그 벌레의 먹이가 되는 나무들이 숲을 이룬 곳이 많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 벌레가 거의 멸종상태여서 쉽사리 찾기도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 벌레를 인공으로 사육하여 번식 시킨다고 하였다. 그 사람은 해마다 자연 상태에서 그 벌레를 단 한 마리라도 찾아내려고 애쓸뿐더러 찾으면 꼼꼼하게 관찰한다고 하였다. 나는 그제서야 한 마디 하였다.

“아, 선생님의 직업은 곤충학자시군요”

그가 황급히 손을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제 직업은 목수입니다.”

“네? 목수가 왜 벌레를 관찰하고......”

내 어줍잖은 반응에 그는 겨우 서너 살짜리 어린 아기만큼 밖에는 일본어를 모르는 내가 알아듣도록 그 역시 서너 살짜리나 쓰는 서툰 영어를 섞어 써가면서 설명을 하느라 무진 애를 썼다.

겨우 그가 하는 말을 해득해 보니 그는 일본의 전통 가구 중에서도 문화재급에 속하는 희귀 고가구를 주로 재현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꼭 만들어 내고 싶은 물건은 따로 있다고 하였다. 이 세상에 단 한 점 남아있는 7세기 때 제작된 그것을 재현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엄연한 의미에서 그 유물은 평범한 가정에서 썼던 물건이 아니라 왕이 개인적으로 소장했던 불교용품이어서 지금 소장된 곳도 유명한 절이라고 하였다.

자신이 해마다 그 벌레를 찾아나서는 것도 그 유물이 그 벌레가 재료로 쓰인 가장 오래된 물건인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게 호류지(법륭사(法隆寺)) 보장전에 소장된 다마무시노 즈시(옥충주자(玉蟲廚子))라고 하였다. 층층이 올려 쌓은 불교의 탑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그 장롱 비슷한 수납장인 그것에다 593년에 즉위한 여왕 스이꼬(摧古)는 불상을 모시고 개인 예불을 드렸다고 전해진다고도 하였다.

아하! 그 법륭사. 고구려에서 건너온 담징 스님이 금당 벽에다가 소나무를 그리니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고 했다는 바로 그 절. 아참, 담징 스님이 그린 그림은 석가여래였지. 소나무를 그린 스님은 솔거고. 처음 지은 법륭사 절은 불타버리고 670년에 다시 지었다지 아마. 나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옥충주자는 백제에서 수입한 것이 분명한데 일본학계에서는 물건이 움직인 경로를 명백하게 토로하지 않는 것을 거의 불문율처럼 지킨다는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중국에서 직수입했다고 얼버무리기도 하지만 그 설은 얼토당토 안 한 것이, 일본 고대 문물의 경로는 분명히 한반도를 거쳤기 때문이다. 하물며 7세기경이면 더욱 더 그렇다는 건 세상이 다 알고도 남는 역사의 진실이다. 이 옥충주자를 미국의 고고학계에서는 이미 한반도의 백제에서 일본으로 직수입되었다고 정의하고 있다.

장황하게 참으로 열의를 가지고 설명을 하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만 흘려보낼 수 없어서,

“그렇게 생각하세요?”

라고 말 가운데 질문을 넣었더니 그는 자신이 그 분야를 연구해온 학자라도 되는 사람처럼 아주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 물건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이후로 거기에 썼던 재료를 쓰는 기법이 일본에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고.

“옥충이라면 비단벌레죠.”

“아, 어떻게 그 벌레를 아십니까?”

그는 옥충이 비단벌레라고 알고 있는 나를 동지나 되는 것처럼 반가워하였다.

“나는 제주도에서 자라서 그 벌레를 많이 봤거든요.”

내 대답에, 처음 인사말을 건넬 때 내가 제주도에서 왔다는 말을 전혀 듣지 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호들갑을 떨면서, 아직도 그 벌레가 제주도에 많은 지, 쉽게 볼 수 있는 지, 시시콜콜 묻기 시작하였다.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사는 곳이 면적으로 보면 콥 딱지만한 섬 안의 도시지만 아무 벌레나 우글거리는 숲속은 아닌 것을.........글쎄요, 라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나를 못내 아쉬운 눈길로 바라봤다. 그리고는 아주 무엇인가 다급한 듯이 의자 팔걸이에 묻힌 테이블을 끄집어내어 그 위에 노트를 펼치고는,

“원래 내 선조는 제주도 사람입니다. 내 성이 한자로는 이거거든요”

하면서 양(良)자를 써보였다.

맞다. 지금 제주 양(梁)씨는 고대에는 양(良)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선조가 신라를 거쳐서 늦어도 7세기쯤에 일본에 들어왔다고 자신의 가문에서는 전해진다고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 선조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 대장장이라는 것이다.

스이꼬 여왕처럼 모계시대의 지도자들을 표현해놓은 일본신화를 보면, 태양을 마음대로 다뤘다든지, 불을 낳다가 그 불에 데어 죽었다는 이야기들이 더러 있다. 그러한 신화의 발상은 아마도 화소가 되는 주요 인물인 대장장이에서 유래했으리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뜻으로 해석한다.

“신라시대 유물 중에도 옥충을 재료로 쓴 것들이 참 많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성씨 이야기를 하다말고 다시 비단벌레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에게는 여행의 목적인 비단벌레를 접어버리면 이야깃거리가 전혀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비단벌레를 어떻게 재료로 써요?”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화두에 적잖이 호기심을 가지고 듣고는  있었지만 내가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여서 조금 짜증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말투는 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 때 비로소 그도 말상대가 자신이 지금 열심히 말하는 그 화두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식한 인간임을 깨달은 것 같았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철썩, 치는 꼴로만 봐서도 짐작할만하였다.

“옥충 겉날개를 썼죠.”

“겉날개?”

이럴 때 누구나 표현하는 그 말 있잖은가 왜. 나도 똑같이, 순간 머리 속에서 번쩍! 강렬한 섬광을 동반한 번개가 내리꽂아지면서 또 그냥 우르릉 쾅, 쾅, 천둥을 치나싶더니 회익,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영상이 있어 그만 정신이 아뜩했다.

그걸 왜 진작 짐작 하지 못했을까! 비단벌레 그 자체만 봐도 몸빛에서 뿜어내는 색깔이 환상적이다. 그에다 겉날개의 빛깔은 전체적인 바탕이 맑디맑은 짙은 금녹색인데다 오만가지 금색깔이 덧씌워져 무지개 색보다 더 찬란하고 영롱한 빛을 발한다. 날개의 가장자리를 향해 갈수록 금가루를 풀어 섞은 아리자리크림슨 색에 가까우면서도 불에 달궈진 벽돌색보다 더 투명하고 짙은 붉은 자주색, 그러니까 해가 저만치 서쪽 끝에 기울어 하늘에다 펼쳐 보이는 노을을 닮은 금빛을 머금으며 도도하게 덧칠해졌고, 더구나 금태비단벌레는 그 찬란한 겉날개 끝을 따라 선명하게 금테가 에둘려있어 화려하기 그지없다. 햇살 아래서 보는 비단벌레 겉날개에는 그 뿐이 아니라 마치 골고루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이 빛이 쏟아진 자리처럼 금빛으로 부서져 아우라를 스스로 뿜어내는 것만 같은 하늘이 내린 벌레이다.

하지만 비단벌레는 그 생태로만 봐서는 익충이 아니라 해충이다. 느릅나무 같은 것의 잎사귀를 갉아먹고 수액을 빨아먹어 결국에는 나무를 죽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대여섯 살 어린 아이였을 때에 천식을 심하게 앓자 아버지는 손수 약을 구하러 봄이 무르익어 참나무이파리가 큼지막하게 손을 벌릴 때에 맞추어 한라산을 드나들었다. 아버지가 찾는 약재료는 산누에였다. 그 누에가 천잠(天蠶)이었는지는 가늠이 되질 않는다. 다만 아버지가 하는 말을 귀동냥으로 들은 바를 기억 저편에 두었을 거라며 유년을 온통 다 뒤져 더듬어 보니, 그 산누에는 떡갈나무나 참나무를 먹고 자라는 벌레여서 산속을 해매다니기 일쑤여도 몇 마리 잡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고 고충을 털어놓던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한라산에 갔다 올 때에는 산누에뿐 아니라 비단벌레도 두어 마리 덤으로 잡아왔다.

“옛날 중국 양귀비도 이 벌레를 금줄에 묶어서 노리개로 앞가슴에 달고 다녔다더라”

나도 양귀비처럼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만들어준 짚초롱에 넣고 애지중지 가지고 놀았다. 문 닫은 방에서 초롱 밖으로 꺼내주면 그 화려한 날개를 펼쳐 방안 여기저기를 날아다녔다. 아버지는 뒤울 팽나무에서 잎이 무성한 가지를 꺾어다가 방구석에 물을 담은 옹기단지를 놓고 거기 꽂아 놔 주었다.    우리집에 잡혀온 비단벌레마다 그렇게 마련한 팽나무가지에서 먹고 자고 날아다니면서 내 아픈 몸을 위로해주곤 하였다.

아버지가 약으로 구해온 산누에는 비단벌레의 위로가 무색하게도 보기에는 그리 징그러웠다. 그 벌레에서 즙을 훑어내어 붉은 구영사 가루에 섞어 먹이려고 할 때마다 나는 경기를 할만치 울어제치며 먹기를 한사코 거부하였다. 그래서 나를 달래어 약을 잘 먹여보려는 묘책으로 들여온 것이 비단벌레였던 것이다.

“이것 봐라. 이런 애벌레가 저렇게 세상에서 가장 고운 벌레로 몸을 바꾼단다.”

그러니 징그럽게 생각하지 말고 약을 먹으라는건데 어디 그게 그렇게 쉽게 입속으로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산누에즙을 먹었는지 먹지 않았는지는 명확하게 기억해낼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 시절 몇 번의 애여름에 경험했던 산누에도 비단벌레도 그에 얽힌 이야기도 아주 사소한 에피소드 까지도 다 기억하고 있다. 비단벌레 똥이 쑥떡만큼이나 짙푸르러서, 푸른 벌레는 다 푸른똥을 눕나보다 그런데 왜 사람은 똥색깔이 먹은 음식 색깔을 닮을까 라며 고민했던 것까지도 기억한다. 

그는 내 표정에서 좀 뭔가 알아차린 기미가 보였는지 멈추었던 말을 다시  이었다.

“며칠 전 한국 뉴스를 보니까 옥충 날개로 장식한 화살주머니 장식품이 오래전에 출토된 신라 고분 유물에서 발견됐다고 하던데요”

그러나 그는 그쯤에서 말을 끊었다. 그가 이어서, “그 뉴스 봤어요?” 라고 했다면 보도듣도 못한 나는 분명히 자괴감에 빠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 손가락보다 좀 더 긴 얇은 청동판인데요, 화살주머니를 허리띠에 연결하는 이런 형태랍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장지보다 조금 더 긴 그것은 아마 네모꼴 츄잉검 비슷한 모양인데 끝이 기억자로 구부러진 물건이라고 짐작되었다. 거기 어디에 비단벌레 겉날개를 깔았을까? 판에다 붙였다는 말일까? 음?

그의 이야기를 따라 조금씩, 안개가 낀 듯 뿌연 의식 속에서나마 비단벌레에 대하여 싹 트던 호기심이 신라 시대의 고분에서 나왔다는 그 비단벌레가 날아들더니 순식간에 짝꿍이 되어 날개짓을 해대었다. 그 바람에 그것들 날개짓 소리는 붕붕~~~ 증폭되면서 나를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다. 나는 찰라에 그 비단발레인지, 그 벌레의 겉날개를 재료로 썼다는 물건인지, 그걸 만든 사람인지, 도무지 분간은 가지 않았지만 그가 설명한 말속의 어떤 존재에 빙의되고 말았다.

그와 나의 대화는 그쯤에서 완전히 끝났다. 내가 어머니를 추모하는 거기, 여행의 종점을 향하여 기차가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갈 무렵에는 오사카역에서 처음 기차에 올라 그와 우연히 마주 앉은 참에 형식적으로 인사를 나누던 그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역에 기차가 서고 내릴 채비를 하면서 그와 나는 다시 한 번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었다.

“그럼 잘 다녀가십시오.”

“네. 선생님도 잘 다녀가십시오.”

그리고 그 날로부터 만 일년 동안 나는 ‘환경학자 글 봐주는 전문가’라는 직업을 접어놓고, 계림로 제14호 고분 출토품인 화살집 장식부품에 매달렸다. 나에게 빙의한 그 존재가 자꾸만 내 삶을 거기로 몰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6세기 초에 서라벌 경주에 살았던 그 물건과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다행스럽게도 당사자 한 분을 인터뷰할 수 있었다. 일천육백여년 전 그 사람을 어떻게 찾았으며 어떻게 명부에서 되살려 인터뷰를 했는지는 알려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럼,   

   

그것에 대하여 해설해 준 이들에 붙이는 나의 오마쥐(Hommage)

    무엇인들 그 나름으로 정해진 장소에 놓이게 된 사연이 왜 없을까마는 이제 와 하는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처음 발견한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무엇에 어떻게 썼던 물건인지를 아무도 몰랐다. 그것이 출토된 장소만 미뤄 보더라도 당연히 예사로운 물건이 아님에는 분명해 보였지만 어디 그것뿐이었겠는가, 무려 일천육백여 년 동안 땅 속 깊이 묻혀 있었던 거기 모든 것들이 다, 심지어는 흙 한 줌까지도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것들이었다.

1946년 어느 날엔가도 한 차례 경주벌에 마치 제주섬의 오름들 마냥 남산만한 크기로 늘어서서 위용을 과시하던 옛무덤들 사이로 사통팔달 새 길이 사방으로 곧게 뚫리는 큰 공사가 벌어졌다. 그 참에 옛무덤 몇 기가 대대적인 발굴팀의 삽질에 열려 찬란한 고신라(古新羅) 유물을 몇 천 점이나 쏟아낼 때도 그와 비슷한 것은 단 한 점이 없었다. 말안장과 화살통 등 그 시대를 살았던 용맹스런 그 누군가, 혹은 그 무덤주인이 직접 사용했음직한 물품이 출토된 적석목곽분인 호우총에서도 그것을 재료로 써서 만들어진 유물은 없었다.  

다들 알고 있을 터, 예로부터 서라벌 경주의 드넓은 벌판에는 고신라에서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무덤들이 즐비하지 않는가.

그것은 1973년 7월 여름이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서라벌 그 옛무덤들 가운데 어느 한 곳에서 쏟아진 유물들 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그 정체를 아무도 몰라봤기 때문에 발굴팀은 그것을 출토된 물품 중의 하나로만 취급하였다.

그것이 출토되는 그 때는 경주종합관광개발계획에 따라 계림로를 닦는 참에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 정비를 함께 추진하고 있었다. 그 일대는 신라 시대의 온갖 무덤유형이 일부러 전시장을 꾸며놓은 것처럼이나 다양한 고분군이 들어선 곳이다.

경주에 자리 잡은 신라 시대 무덤들이 다 그렇게 둥그런 봉분을 인 거대한 흙산봉우리들로만 이뤄진 것이 아님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거기에는, 땅바닥에 큰 구덩이를 파 평장을 한 ‘구덩이 무덤’이 있는가 하면, 조롱박 모양으로 조성된 것도 있고 표주박을 엎어놓은 것과 같은 것도 있으며 땅 위에 둥그렇게 흙더미를 쌓아 돔과 같이 만든 것도 있다.

  또한 그 크기도 가지각색에다 조성하는 방법과 자재도 천차만별이어서 어떤 무덤은 그야말로 산이 하나 우뚝 앉아 긴 세월을 흔연히 지나왔다 싶다. 어떤 무덤은 그 안의 구조가 수직인 것도 있고 수평인 것도 있다. 안으로 파고들면 돌로 축조되었고 또 어떤 것은 나무로 지어놓았다 천년만년 혼으로나마 살 것처럼 견고하고도 넉넉하게. 그래서 그 무덤이 있는 곳 지명을 뭐라고 하는지, 생긴 모양은 어떠하며 축조된 재질은 무엇인지를 가름하여 예를 들면, 일제강점시대에 그 경주벌에 있는 흙더미면 다 옛무덤으로 간주하고 1호분, 2호분으로 일연번호를 붙여놓았던 것을 그 이후에 발굴이 진행되면서 고유한 이름이 덧붙여지는 것이다.

누구의 무덤인지 발굴을 시도할 초장에는 몰라서 막연하게 이미 흙산봉우리마다 들이대었던 일연번호로 불러지다가, 열어 제치고 유물을 찾아내면서 무덤주인의 모습이 밝혀질 만한 독특한 단서가 제공되면 이는 고유한 이름을 얻는 단초가 된다.

신라 시대의 옛무덤들뿐만 아니라 이 땅에 수많이 출(出)하고 몰(沒)한 당시대 사람들이 저 세상으로 떠난 자리, 그 무덤들은 본의 아니게 발굴하는 이들의 손에 맡겨져 하나둘 음택의 내부가 적나라하게 밝은 햇살 아래 드러내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역사는 적잖이 길다.

어쨌든, 그 여름 내내 오래도록 간직되었던 무덤 주인의 저 세상 살림에 동행하였던 이 세상살이 흔적들은 그 발굴팀 뿐만 아니라 옛말로나 들어 알던 보통 일반시민이 신라적 사람살이에 대하여 경외심을 품을 만치 다양한 물품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경이로운 그 모습으로 나타나 이 시대를 압도하고 있다.

경주 토박이들은 서라벌 옛터에 산과 같은 실물대 크기로 쌓아진 그 흙봉우리들을 봉황대라고 불러왔다고들 한다. 더구나 황남동 같은 데는 수많은 봉분을 거느리고 거대한 흙산봉우리 두 기가 나란히 쌍둥이처럼 앉아 있는데다 그 옆으로 물이 흘러 미나리밭을 이루니 ‘황남 미나리깡 큰 쌍둥이 봉황대’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이 한 쌍의 봉황대도 그 때에 발굴되어 황남대총이란 이름을 얻었는데, 북쪽 봉분은 왕비의 것이고 남쪽의 것은 임금임을 증표하는 금관이며 허리띠며 말안장이며 표석이며 수도 없는 유물이 쏟아졌다한다. 그래도 그것만은 거기에도 없었다.

그 수많은 신라 옛무덤 가운데서도 그것이 묻혔던 무덤은 단 한 기, ‘계림로 고분 14호’ 로만 지금까지는 알려졌다. 그 옛무덤이 조성된 시기는 여러 모로 추정해 보건대 6세기 초쯤 되었을 거라고 사학계는 추정한다고 하였다.

그 시기는 신라가 국가체제를 확고하게 갖추던 때였으며, 각각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걸출한 청년남녀들이 결집한 결사체를 국가인재양성 기관으로 신설, 나라의 지도자를 배출하는 원화제도를 거쳐 화랑제도를 설치한 때이기도 하다.

그것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아무도 그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고 또 세월은 만만찮게 흘러갔다. 그 무덤 계림로 14호 고분에 그것도 있었음이 알려진 것 자체가 발굴되고도 한 참 뒤, 삼십 수년이 흐른 2006년 12월에 이르러 그때의 발굴기를 작성하고자 수습된 유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였다.

그것의 정체는 겉으로만 봐서는 그리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시복(矢菔)이라고 일컫는 화살주머니라고도 하고 화살꽂이라고도 하는 화살집에 달린 작은 장식부품에 불과하였다. 그것도 두 개가 한 쌍을 이루는 것인데 발굴된 유품에는 달랑 그것 하나였다. 그랬으니 발굴 당시는 그것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게 도리어 당연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이 쏟아지는 찬란한 유물들 속에서 그것은 어쩌면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졌을 수도 있다.

시복이란 화살꽂이는 화살전체를 담아 뚜껑을 닫아 간수하는 화살통인 전통(箭筒)과 함께 신라의 옛무덤 뿐 아니라 조선조 시대의 음택 소장품에서도 심심찮게 출토되는 유물이다.

시복의 쓰임새는 주로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쏠 때 살을 쉽게 뽑아 시위에 얹기 편하도록 허리띠에 붙여 허벅지께 아래 늘어뜨려 차는 작은 주머니로 화살을 대여섯 대 세로로 꽂아 세우게 되어 있다.

그것은 그러니까 가죽이나 비단으로 만든 그 시복이란 주머니를 허리띠에 이어주는 장식 걸쇠였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활 잘 쏘는 기마민족이었다. 언제나 말 달리며 화살을 쏘는 것이 일상생활이었기에 마구인 말안장이며 활에 관련된 화살통이며 부품들이 그렇게나 다양하게 무덤마다 출토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평상시에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느라 사냥감을 겨냥하여 화살을 쏘았을 것이고 비상시에는 전장에서 적을 물리치려고 활시위를 당겼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일천육백 년 전 그 시절에는 흔하디흔한 화살집 시복의 부품 중의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길이가 11㎝, 너비가 고작 2.5㎝ 가량 되는 손가락이 긴 어른남자의 장지 하나 길이보다 조금 더 길까말까한 직사각❚형청동제 얇은 쇠붙이 조각이니 말이다.

누군들 허리춤에 활집만 착용했을 이 만무하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고 활집인 동개를 차면 당연히 화살주머니 시복도 찼을 것이니 세상에 널어진 게 시복 걸쇠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시복과 허리띠를 이어주는 단순한 쇠붙이 장식부품이 아니었다. 그 어느 청동제 시복의 장식부품들 보다 매우 정교하게 세공되어 빼어나기 이를 데 없는데다 그 조그맣고 종잇장처럼 얇은 직사각❚형 쇠붙이에 담을 수 있는 이 세상 조형예술의 극치를 극도로 함축하고 압축하여 고스란히 담아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출중하게 빼어난 장인의 솜씨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고 감히 단정할 만 하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것은 오로지 그것 하나만으로도 홀로 그 값으로 영원하게 존재할 수 밖에 없도록 운명지어진 물건 같았다. 

그 걸쇠는 세로로 세워 허리띠에 연결하는 것이어서 세운 형태❚에서 줄줄이 아래를 향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하트♡ 모양의 구멍을 네 개나 뚫어 놓았는데 어찌나 곡선이 단아하고 풍부하면서도 아름다운지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또 걸쇠 가운데 뚫어놓은 하트♡ 가장자리 양 옆을 따라 쌀 한 톨 만한 크기로 자른 금싸라기를 다이아몬드♢형으로 세공하여 다섯 개씩 열 개를 박아놓았다. 마음은 다이아몬드보다도 귀하고 아름답다고 역설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살짝 기역(ㄱ)자로 구부러진 등 위에다 둥그런 청동단추를 봉곳하게 붙여 놓아 허리띠 구멍 같은 것에 잘 이어지도록 실용적으로 만든 것이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신라를 창건한 시조부터 대장장이어서 그 나라의 모든 쇠붙이로 만들어진 것들은 하나 같이 정교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동시대의 다른 그 어떤 시복 출토 유물들과 그 쓰임새는 조금도 다르지 않으면서 전혀 다른 장식부품인 것만은 확실하였다. 그것은 고대유물의 ‘유’ 자도 모르는 문외한이 봐도 한 눈에, 아! 하고 비명을 지를 만치 경이로웠다. 

맨 처음 그것을 보자마자 나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짝마저 잃어버리고 홀로 남은 손가락만한 직사각형 청동판 시복 걸쇠가 마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것에 깃든 절절한 사연을 이 시대에 털어놓을 날만을 기다리지는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차마 그것이 거기 조용히 자료를 품고 있다가 일천육백 여 년이 흐른 후에,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다 토파하는 사명으로 묻힌 그 시대를 증명하는 타임캡슐과도 같았다.

내 호기심은 경외심으로 바뀌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설명한 이들의 기록들이 내 마음을 정중하게 바꾸는 길라잡이가 되었다. 그것에 대하여 해설해놓은 의미 있는 글들은 그것에 얽힌 역사의 진실을 인터뷰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음을 행운으로 여긴다.

 

그 대장장이가 자신에 대하여 한 말

    그 화살주머니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고 싶어 나를 찾아왔는가 아니면 만든 사람을 알고 싶어서 왔는가? 그도 저도 아니라면 그걸 누가 쓰다가 그 무덤에 묻히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알고 싶어 왔는가? 굳이 먼 길을 마다않고 나를 찾은 속내는 진정 무엇인가? 아...... 그렇단 말씀인가? 그 모든 걸 다 알고 싶다는 말씀이지? 내 입으로 그 전후좌우 사정을 말하라면 며칠 가지고는 당치 이야기 끝을 볼 수 없을 것인데 어쩌겠는가, 그래도 들어볼텐가? 이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이 가슴이 문드러져버린 그 이야기를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까나........그렇지, 내가 태어났던 그 때로부터 운을 떼면 되겠구먼. 

나는 본디 탐라사람이다. 성은 양(良)가이며 이름은 돌통이라고 한다. 내가 지녔던 성씨만으로도 내 태생을 조금은 짐작했을 터이지만 사족을 좀 붙여야겠다. 탐라를 건국한 세 성씨 중의 한 가문에 속했음으로 부모를 위시하여 일가방상이 꽤 되었다. 그런데 나는 우리 부모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탐라에서 살았던 어린시절의 내 삶은 평범하고 평온하였다. 섬사람이면 건국 시조의 후예이든 아니든 누구나 다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할 도리를 하면서 어울려 살았으니 나라고 뾰족하게 별다른 신분을 지니고 살 리 만무하잖는가. 정말로 평범한 유년을 행복하게 보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내 앞가림을 해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들 제 할 일을 하여 일용할 양식을 얻고, 몸을 가릴 옷을 지어 입었으며, 비바람과 추위며 더위를 막아줄 거처를 마련하였다. 열다섯 살이 되던 날, 아버지는 탐라의 풍습에 따라 나 혼자 독립하여 살아갈 바위동굴 하나를 찾아주었다. 그 집은 양지뜸에 있어 온종일 햇살이 들어오는 안온한 바위동굴이었다.

그 시절에는 보통 사람에게 딱이 지금과 같이 정하여 붙여놓은 유일한 이름이 없었다. 생긴 모양대로 혹은 하는 일을 봐서 성씨에다가 아무개, 하고 붙여 부르면 그게 바로 이름이었다.

탐라사람이 왜 신라에서 살았느냐고 시방 묻는 것인가? 무슨 질문이 그러한가? 사람은 아무 곳이나 자신이 살고 싶은 곳에서 살수 있는 것이 아닌가? 탐라땅 이도리에서 태어나 난 자리에서 부모 모시고 자라고 커서 열여덟 살 때 동갑내기 물질 잘하는 삼도리 부(夫)씨 집안 잠수(潛嫂)비바리와 혼인을 하였다. 그 사람이 나한테 시집오자 우리 마을 사람들은 ‘삼도리팡’이라고 불렀다. 삼도리에서 시집온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 사람과 나는 서로 뜻이 맞고 생각이 같고 사는 방법 또한 비슷하여서 말 그대로 천생연분이었다. 그 사람은 조용하지만 명랑하였고 살림 솜씨도 야무졌다. 쉬지 않고 집안팎 살림을 하다가도 짬짬이 물때를 봐가면서 물질을 하여서는 맛깔스런 반찬을 밥상에 올리고 입에 맞는지 조용히 물어보곤 하였다. 그 사람이 워낙 물질솜씨가 좋으니 우리 부모도 물천 것을 귀하지

않게 맛볼 수 있었다. 물천 것이 뭐냐고? 그건 탐라섬 토박이들이 바다에서 잡아 올린 해산물에 두루 쓰던 말이다.

우리 두 사람은 사는 것에 큰 것을 바라지 않았으며 헛되이 탐내지 않았다.  나는 본디 물려받은 직업이 석수장이 돌챙이니 탐라섬에 흔하디흔한 돌로 모든 필요한 생활용구들을 만들었다. 마소한테 물과 여물을 먹이는 구유도 만들고 빨래하는 확도 만들고 단단한 바윗돌을 세로로 쳐서 돌도끼며 가죽 무두질할 때 쓰는 돌칼도 만들었다. 사람들은 내 돌 다루는 솜씨가 여간 아니라고 칭찬을 할 정도였다.

그 외에도 단단하고 질긴 먹사오기낭 산벚나무며 굴묵이낭 느티나무들 아름드리 큰 것들이 벼락 맞아 쓰러지면 돌도끼로 찍어다가 살림도구들을 만들곤 하였다. 우리 탐라사람들은 사냥도 잘했으니 먹사오기낭의 검은 심은 화살촉으로 제격이었다.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탐라섬이 애시당초 이 세상에 솟구쳐 나타날 때부터 철을 품지 않았으니 쇠가 될만한 원료가 아직까지도 생산되지 않는 것이다. 다만 구상무역으로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들여와 쓰는 이들이 더러 있었지만 그야말로 그러한 쇠붙이를 개인 것으로 가진 사람은 탐라왕이나 지도자급 몇 사람에 불과하였다.

그건 그렇고, 그 사람과 내가 혼인하고 가까스로 만 일년이 막 될락말락할  즈음에 우리는 부모가 되었다. 그 사람은 아이를 목숨과 바꿨다. 아이를 낳는 중간에 몹시 하혈을 하여 우리 양쪽 어머니들이 산파노릇을 하다가 기겁을 하였다. 겨우 아이를 받고 보니 몸이 그리 크지도 않은 딸이었는데 낳기가 그리 힘들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기진맥진하였으나 막 탯줄을 자른 아이를 품고 젖을 물렸다. 그게 끝이었다. 꼼지락거리는 갓난아기가 초유 한 모금 빠는 사이를 기다려주지 못하고 그 사람은 그만 영원히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나갔다. 미리 아이가 탯줄을 끊으면 세상을 하직하려고 작정이나 한 것처럼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가버렸다. 무정한 사람........  

나는 그 사람을 잃고서야 비로소 사람의 한세상살이의 소중함에 눈을 떴다.  한 번 낳고 죽음이 결코 내 뜻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임을 느껴 알았다. 그래서 다들 한 번 살면 끝나버리고 마는 삶을 잘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탐라섬을 떠나 살아보고 싶었다. 부모형제 일가방상을 떠나 온전히 새롭게 세상살이를 시작해보고 싶었다. 그 사람과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인 그 갓난쟁이 핏덩이를 품에 안고 무작정 부여로 떠나는 배에 올랐다.

마침 백제나라 공주 근방에 아는 탐라 사람이 일찍이 나와 살고 있다는 아버지 말을 나침반 삼아 떠난 길이었다. 그 때가 서기 530년 늦봄인가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 대장장이가 그녀에 대하여 한 말

    부여나루에서 뱃사공들과 하직하고 갓난이한테 동냥젖을 물리면서 공주에 도착하니 마을이 번잡하여 쉽사리 탐라 사람을 찾을 길이 없었다. 발 가는대로 다니면서 탐라 사람 사는 데 아는 이 없느냐고 입 아프게 탐문하여도 안다는 사람이 없으니 없었다. 며칠을 동냥밥, 동냥젖으로 허기를 달래면서 의지가지없는 부녀가 공주를 해매고 다녔다.

하루는 갑자기 이른 소나기가 퍼부어 남의 집 처마 밑으로 얼른 숨어들었다. 탐라와는 달리 육지 사람들은 다 지붕을 인 집안에서 살고 있었다. 그 집에서 쟁-쟁- 탱글탱글 탱그르 일정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탐라에서는 천신제를 지낼 때 멀리 중국에서 들여온 놋그릇을 두드려 악기처럼 연주하였다. 그 소리와 매우 비슷하였다. 고개를 길게 빼어 집안을 들여다보니 웃통을 드러낸 두 사내가 매를 높이 들어 놓으면서 무엇인가를 치고 있는 소리였다. 그 집은 대장간이었던 것이다. 탐라에는 대장간이 없었으니 달군 쇠를 모루에 올려놓고 망치질하여 쇠의 성질을 만들려는 도구에 알맞도록 눅이고 돋우는 걸 모른다고 부끄러울 것까지야 뭐 있으랴만 사실은 되게 부끄러웠다. 내가 아는 세상은 탐라 나라인 내 고장 탐라섬이 전부여서 보고 배운 바가 일천하였음이 순간에 드러났다. 당장 그 집안으로 달려들어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였더니 군소리 없이 나를 일꾼으로 받아주었다. 쥔장은 내가 품에서 내려놓은 갓난이를 보자마자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이봐 임자, 어서 나오소. 당신 부른 젖 달라고 여기 애기 울어!” 

그 쥔장 마누라는 쇠 다루는 대장간에서 웬 애기타령이냐면서 엎어질 듯이 급히 달려 나왔다.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누더기를 걸치고 아기를 안은 두 팔을 앞으로 내민 나와 대장간 식구들을 휘 한 바퀴 둘러보는데 나는 조마조마하기가 간이 다 졸아붙을 지경이었다. 그러한 기우도 잠시, 그녀는 달려들어 독수리가 병아리 채어가듯이 내 팔에서 아기를 가로채어 가로 안더니 앞가슴을 헤집고 젖을 물렸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