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목요논단]우리는 서로의 산타이다

한라산한란 2008. 12. 25. 01:01

[목요논단]우리는 서로의 산타이다


입력날짜 : 2008. 12.25. 00:00:00

해마다 성탄절이란 호칭을 앞세워 12월25일은 온다. 올해는 유독 가난한 세밑 자락을 끌며 그 날이 왔다. 엄연히 호칭한다면 하루를 딱 지칭하는 것이니 성탄절이 아니라 성탄일이겠다. 어쨌거나 이 날은 그 본래의 종교적 의미와 무관한 이들도 누구나 다 산타할아버지를 떠올린다.

올해는 메가톤급으로 덮친 경제대란이 그렇잖아도 옹색한 서민의 주머니를 탈탈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털어버렸다. 그래서 길거리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가 아무리 애절해도 고린 동전 한 닢 나눌 여유가 없어 귀를 막고 지나기 일쑤이다.

이토록 절망적인 성탄절임에도 루돌프사슴이 끄는 수레에 착한 이들에게 줄 선물을 가득 싣고 '하하하' 푸짐한 웃음을 하얗게 내리는 눈 속으로 날리며 하늘을 달리는 빨간 외투를 입은 배불뚝이 산타, 그 고전적인 이미지가 변함없이 뇌리를 스친다.

오지랖이 넓지도 못하면서 괜시리, 올해에도 산타를 기다린 모든 이들에게 길 잃지 않고 잘 찾아갔을까? 부탁한 선물들은 차질 없이 배달했을까? 이왕이면 황새왓 미카엘신부네 아름다운 쉼터에도, 탑동 노숙자에게도, 내 가엾은 조카 은다에게도 두루두루 산타가 들렀으면 좋겠다. 어린아이처럼 공상에 빠지다말고 화들짝 놀라 깨어나, '산타는 불황을 가장 잘 타는데…' 마음을 따뜻하게 녹이던 생각은 슬며시 서글프게 꼬리를 사린다.

산타할아버지의 유래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하여 자선한 그리스 성자 성 니콜라우스에서 비롯되었으니 그러한 생각의 연상 작용이 그리 주책없다고 타박 당할 바는 아니라고 본다. 다만, 그 연상 작용이 개념을 상실하고 한참 '삼천포로 빠지니' 그것이 문제이다. 오죽 삶이 고달팠으면 어린이나 꿈꾸는 산타에게 행복한 하루를 바랄까 싶으니 스스로 부끄럽다.

고개를 떨어트린 그 순간 문득, 이 시대의 산타는 일방적으로 선물을 주는 존재가 아닌, 바로 내 자신, 혹은 내가 만나는 바로 그 사람, 우리들 서로라는 인식에 의식의 눈을 번쩍 떴다. 예컨대 얼마 전에 '엄마, 울지 마세요. 사랑하잖아요.' 라는 시집을 낸 열여덟 살 지적장애아 이승일이가 나에게는 올해의 산타였음을 알아차렸다. 이 소년 시인은 보기만 해도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마치 티끌 한 점 앉지 않은 맑은 거울 그 자체나 진배없어서 마주 하면 당장 내가 그대로 비춰진다. 사물을 보고 느끼고 언어로 표출해내는 그 과정이 하도 선명하다. 나뿐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나와 똑같은 말을 한다. "너를 보니 행복하다 야!" 그래서 그의 어머니를 만날 기회가 닿으면, "승일이도 데리고 나오세요." 하고 권하기도 한다.

정작 이 소년 시인은 크리스마스는 뒷전이고 내년에 고등학생이 되는 신분변화에 더 신이 나 있는 모양이다. 남녕고등학교에서 흔쾌하게 입학을 허가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승일이에게는 남녕고등학교가 2008년의 산타인 셈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교육환경 아래 일반고등학교에 지적장애를 가진 학생을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용단이 필요한 결정인지를 우리는 다 안다. 그와 같은 아이들 중에는 레인맨이니, IQ 5백을 훌쩍 넘는 비범한 이들이 있다는 말은 당장 학교 측에 큰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오직 남녕고등학교로부터 그 학교 학생이 되는 선물을 받았다면 남녕고등학교도 순수한 어린 천재 시인 이승일이란 학생을 선물로 받은 것은 아닐까. 역발상을 한다면 다 산타인 셈이다.

물질이 개입되지 않더라도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고 더불어 살기를 작정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산타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한 마음은 훈훈하다.

메리 크리스마스!

<한림화 작가>